계속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남
잊지 않기 위해 남긴다





2004년 여름, 종로3가 역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조금 늦는다길래 의자에 역 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옆에 앉아 계시던 어떤 아저씨가 내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아저씨 앞에는 큰 보따리 하나가 있었는데, 아마 내게 어떤 물건을 팔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예의를 갖추어 거절했다. 그런데 몇 초 후 내게 다시 말을 거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었다. '이런, 또 귀찮게 되었군.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까?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알고보니 물건을 팔려고 말을 거신 것이 아니었다. 내게 문자메시지를 하나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시려고 했던 것이다. 내게 전화번호 하나를 보여주시고, 아저씨의 여동생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늘 열심히 일해주어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불러주시는 대로 문자메시지를 작성해 여동생분의 번호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친구가 거의 도착했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조금 걸어갔다. 5호선에서 1호선과 3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으로 향했다. 그런데 걸어가는 도중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다시 말을 거셨다. 제대로 보낸 것이 맞는지 한번 더 확인해보고 싶어셨던 모양이다. 나는 제대로 보냈다며 아저씨를 안심시켜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 아저씨의 동생은 정말 행복한 분이시라고. 삶은 늘 고단하기 마련이지만 아주 소중한 행복을 가진 분이시라고.

그날 나는 가끔 그 아저씨를 생각했다. 아저씨 덕분에 좀 더 좋은 기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은 그 아저씨를 종종 생각하곤 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내게 이야기를 하셨는지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물론 이제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전히 그 아저씨의 표정이 내 눈앞에 선하다(아마 난 그 날 분명 일기에 이 내용을 썼을 테고, 어딘가에는 남아 있긴 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여기에 다 쓸 수 있다면 이 글이 더 멋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내 머릿속에 있는 희미한 그림자를 다시 살려낼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그때 아저씨의 표정에는 따뜻한 사랑이 넘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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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로를 좋아한다. 종로의 역사와 사회학적 의미에 대한 어떤 심오한 철학적 이해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곳에 살아본 적도 없고, 특별히 깊게 생각해본 적도 솔직히 없었다. 다만 내게 있어서 서울의 많은 지역 중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는 건 확실하다. 일단 내가 사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으며, 내가 다녔던 대학교와도 가까워 마을 버스를 타면 학교 뒷문으로 갈 수도 있었다. 큰 서점들이 있고, 서울아트시네마가 있으며, 인사동과 삼청동이 바로 근처에 있다.

어쨌거나, 이 글을 쓴 것은 정말로 '갑자기' 그때 있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계속 잊고 있다가 생각이 나니 어디에든 남겨 놓아야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쓰면 사람들이 나를 마음이 따뜻하고 세상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으로 생각할까 걱정된다. 사실 나는 염세주의자며,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니 부디 오해하지 마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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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eidoscope l 2008/08/20 18:59



오늘 정말 오랜만에 너를 만났다. 한 1년만이 아니었을까? 너와 내가 만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계속 살아 온 너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멀리 있는 곳에서도 인연이 닿아 친구가 되었다. 나는 너의 글을 보며 이미 예감했던 것일까.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 너와 내게 자주 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안타깝다.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면 하고 바랄 때도 많다. 물론 마음은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지만.


나와 아주 많이 닮은 너를 보며, 나는 그래도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노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있는 여자 중에서 너는 나와 몇 번째로 닮은 여자일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너는 나와 몇 번째로 닮은 사람일까. 어쩌면 우리 엄마 다음일까? 너와 내가 그토록 많이 닮았기에, 우리는 서로의 위태로움과 나약한 모습까지 공유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네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다. 오히려 넌 내게 이야기해 주고 싶을 거라 믿었기에. 나도 너에게는 내 상처를 일부러라도 말하고 싶기에.


너에게 준 책 선물이 부디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한달 전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을 몇 명 떠올리곤 했는데, 물론 그 중에 한 명은 너였다. 내가 이 책을 왜 좋아하는지 너는 분명히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 책은 겉보기에는 조금 딱딱하고 지루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서두에 나오는 역자의 해설 부분에서 특히 그렇게 느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 정도는 충분히 참아줄 거라고 믿는다. 책을 읽으며 마음이 움직일 수 있기를. 내 마음도 움직였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내용들을 내면화하지는 못했다. 단지 힘든 내 마음에 조금 위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이 겨우 이런 정도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만 너에게는 조금 더 나아간 무언가가 될 수 있기를. 너의 행동과 세계관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더 멋진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너의 커다란 눈에서 빛나고 있는 그 눈빛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너의 세계에는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을까. 그 속에는 얼마나 캄캄한 심연이 있을까. 나라는 존재가 너의 외로움에 더 많은 힘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너도 알고 있지, 나 역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그러면서도 끝끝내 나는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몸부림치는 것을. 그래도 너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이 만나 더 큰 외로움이 되지는 않도록 하자.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는다. 나는 살아오며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훨씬 많이 해 왔다.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믿어 주기 바란다. 내가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느낄 때만 나는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의 그 외로움, 아픈 마음을 보며 내 아픔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죽지 못한다면 왜 죽지 못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삶의 이유에 여러가지가 있다면,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고.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오늘도 삶의 이유를 또 하나 확인했다(너도 알겠지만, 물론 어제도 확인했었지). 문득 너도 가끔씩 왜 살아야 하는지 하는 궁금증이 생길 때는, 너의 존재에 감사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주기를. 그리고 내가 그 중 한 명이라는 것도.

 

Kaleidoscope l 2008/08/1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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